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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지동석불석탑

원지동석불석탑
원지동석불석탑
지정별 서울시 유형 문화재
지정번호 93호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원지동 362-4,5
수량 석불1구, 석탑1기
지정일 1993. 4. 3
소유자 서초구청
관리자 서초구청

고려말, 조선초기의 토속적인 양식을 띠고 있는 약 2m크기의 미륵불과 소석탑 규모의 3층 석탑이 있다.
미륵불은 원터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지성을 드리면 기원자의 길흉화복을 계시한다 하여 일본경찰이훼손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원지동 청계산 등산로로 진입하는 고속도로 굴다리 입구 오른쪽에는 13.2㎡ 정도의 미륵당 (원지동 362-4,5번지)이 세워져 있다. 이 안에는 목탁과 제기가 갖추어져 있고 크기가 2m정도 되는 백색 입상인 미륵불이 모셔져 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3호인 이 미륵불은 원터마을의 수호신으로 1년에 한번씩 주민들이 동제를 지내고 있다. 원래 이 미륵불은 아주 신비한 영험이 있어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마차를 동원하여 이 미륵불을 일본에 반출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다. 사람들이 미륵불의 영험을 믿고 계속 몰려들자 일본인들은 미륵불의 배꼽을 쪼아내었는데 그 후부터는 미륵불은 영험한 능력을 상실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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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사목불좌상

대성사목불좌상
대성사목불좌상
지정별 서울시 유형 문화재
지정번호 92호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산141-4
수량 1구 1기
지정일 1993. 4. 3
소유자 대성사
관리자 대성사

대성사 목불좌상은 앉아있는 형태의 부처님을 조각한 불상이다.
이 좌상은 조선후기에 나무로 조각된 것인데 후대에 겉표면을 도금하였다. 이 절은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백용성스님이 주석 하였다고 한다. 대성사는 백제 때부터 유래된 오랜사찰이다.
백제 제15대 침류왕 원년(서기 384년) 백제에 불교를 전해 준 동진의 마라난타가 백제로 오는 동안 음식과 기후가 맞지 않아 걸린 수토병을 이곳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 고쳤다고 전해지며, 이곳에 대성초당을 세우고 머물렀다고 전하며, 이것이 후에 대성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신라와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많은 승려들이 이곳을 거쳐갔고, 그 가운데서도 원효대사ㆍ보조국사 지눌ㆍ무학대사 등 유명한 고승들이 이곳에 머물렀다. 그리고 근대에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중 불교계 대표였던 백용성 스님이 이곳에 머물면서 민족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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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권사부묘소

청권사부묘소
청권사부묘소
지정별 서울시 유형 문화재
지정번호 12호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 191
수량 1기
지정일 1972. 8. 30
소유자 사단법인 청권사
관리자 사단법인 청권사

청권사는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묘와 사당으로 방배동 191-1 에 위치하고 있다.
효령대군은 태종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태종 12년 에 효령대군에 봉해졌다. 평소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던 효령대군은 독서를 즐겼으며, 특히 불교에 독실하여 세조 10 년(1466) 원각사 창건때 조성도감제조가 되어 감독을 맡기도 했다.
한편 원각정을 국역ㆍ간행하기도 했다. ‘청권’ 이라는 사당의 이름은 <논어> 권18 미자편에서 연유된 것이다. 즉 ‘위우중이일 은거 방언 신중청 폐중권 ’이란 구절 의 ‘신중청 폐중권’의 약어인데 그 고사는 다음과 같다.

관련고사

“고대 중국에 있어서 은나라가 쇄하고 주나라가 신흥할 때이다. 주나라의 태왕은 아들이 셋인데 장자는 태백, 차자는 우중, 셋째는 계력이다 계력이 아들 창을 낳으니 성덕이 있는지라, 태왕이 상나라를 칠 생각이 있었는데 태백이 따르지 않으니 대왕이 마침내 왕위를 계력에게 전하여 창에게 미치게 하고자 하니 태백이 이를 알고 곧 우중과 함께 도망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태왕이 셋째인 계력을 세우고 나라를 전하여 창에 이르러 3분된 천하의 둘을 얻으니 이가 문왕이다. 문왕에 이어 아들 발이 왕위를 계승하여 상나라를 이기고 천하를 얻으니 이가 무왕이다. 이렇듯 주왕실의 천하를 이룬 그 공이 태백과 우중 형제의 양보함에 근원하고 있음이다. 또 우중은 오나라에 거하면서 머리를 깎고 몸에 문신하여 옷을 벗어 장식하였다. 그리고 숨어 살면서 홀로 착하게 하니 도의 맑음에 합한것이요. 방언하여 스스로 폐하였으니 도의 권도에 합한 것이었다."

이처럼 태왕의 차자인 우중이 ‘처신한 것이 청도함에 맞았고, 스스로 폐한 것은 권도함에 맞았다’ 는 이 고사를 효령대군에 비유한 것이다. 일찍이 효령대군은 형인 양녕대군과 함께 아우인 세종에게 손양으로 처신하여 청도함에 맞았고 불교에 귀의함으로써 스스로 폐한 것은 권도함에 맞음이니 이러한 행동을 칭송하는 뜻에서 ‘청권’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서울시는 1972년 ‘청권사부묘소’ 라는 이름으로 청권사와 효령대군 묘역을 지방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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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상공신도비

성안상공신도비
지정별 서울시 유형문화재
지정번호 60호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산152-5
수량 1기
지정일 1984. 11. 3
소유자 목천상씨대종중
관리자 목천상씨대종중

상문고등학교(방배동 1000-1)內에는 조선 명종때 정승을 지낸 상진(尙震)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이 비는 상진이 타계한 2년 뒤인 명종 21년(1566년)에 세워진 것으로 1984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제 제60호로 지정되었다. 상진의 신도비는 전체높이 362㎝, 비신높이 220㎝, 폭170㎝, 너비 106㎝, 두께 36㎝이며 비신과 대석 옥개석 등 삼부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문은 선조 때 영의정이던 홍섬이 지었고, 글씨는 중종의 부마이며 남원운봉의 황산대첩비문을 쓴 송인이썼다.
신도비 서남쪽 언덕에는 호석만 있는 쌍분이 자리잡았는데, 하나는정경부인 전주 이씨의 봉분이다. 상진의 자는 기부, 호는 송현이며,시호는 성안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읜 후 매부집에서 자란 상진은 15세때까지는 학업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가 동년배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자 학업에 매진하여 10개월만에 글이치에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중종 14년(151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에 제수된 뒤 홍문관 부제학·경기도관찰사·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명종4년 (1549년)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16년동안 재상직에 있으면서 충성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치정하여 업적이 황희와 허조 다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 청렴결백한 그의 성품을 말해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오는데 어느날 집안의 창고가 무너져 내린 일이 있었다. 종들이 수리를 한다고 서두르자 공이 말하기를 “네가 비록 창고를 완전하게 만들어 놓아도 무엇으로 채우겠느냐”하고 웃으면서 말했다고 한다. 훗날 그가 죽자 명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도노덕대신(悼老德大臣 : 노덕대신을 애도함)”이라는 시를 짓게 하였으며 성안(成安)이란 시호를 내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 하면 지금의 남대문로 3가 일대인 상진이 살던 동네를 조선말까지 상정승동 또는 상동이라고 하였는데 영조도 이곳을 지날 때면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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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리뽕나무

잠실리뽕나무
잠실리뽕나무
지정별 서울시 기념물
지정번호 1호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잠원동 1-54
수량 1주
지정일 1973. 1. 26
소유자 서울특별시
관리자 서초구청

잠원동 1번지 54호 신동초등학교 북서쪽 잠원로변(한신아파트 119동 앞)에는 1973년 1월26일 서울특별시 지방기념물 제1호로 지 정된 잠실리뽕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흉고둘레 1.4m의 노거수인 이뽕나무는 조선초기에 심어진 것으로 추측되나 정확한 식수시기와 수령은 알수 없다. 그러나 성종 ~ 연산군 재위기간에 이 지역 일대에 신잠실이 설치될 때 심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고사된 나무의 상태는 원줄기에서 두갈래로 갈라져 자랐는데 가지 중간에서 잘린 상태이다. 이뽕나무 주변에 대한잠사회에서 뽕나무 묘목을 심어 예전의 양잠이 성했던 것을 시민들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이 뽕나무가 잠실리뽕나무로 불리는 것은 조선초기에 이곳에 신잠실이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곳은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잠실리였다.
그러나 1963년 서울에 편입될 때 이미 현 송파구 (당시는 강동구)에 잠실동이 있으므로 중복을 피해 잠실리의「잠」 자와 신동면 신원리「원」자를 따서 잠원동이라 칭한 것이다. 흔히 잠실이라 하면 민간에서 잠종을 받아다가 뽕잎을 먹이고 누에를 치는 곳을 일컫는다. 그러나 조선전기 각종 문헌에서 볼 수 있는 잠실은 일반 민가의 잠실이 아니라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를 의미한다.

조선초기에는 중국의 예에 따라 우선 궁중에 잠실을 설치하였다. 이처럼 궁중에 잠실을 설치한 목적은 중전과 세자빈이 뽕나무 를 기르고 누에 치는 일의 공들임을 익히도록 하며 백성에게 길쌈의 시범을 보이는 데에 있었다. 태종은 양잠을 국가적인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잠실도회를 설치ㆍ운영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하여 왕 16년 2월 우선 지방에 시범 잠실도회를 설치하니 이것이 잠실도회의 효시이다.
그 목적은 백성들로 하여금 양잠법을 견문시키고 이를 본받아 양잠 기술을 익히도록 함에 있었다. 서울지역에 잠실을 설치한 시기는 세종때로 추정된다. 조선전기에는 서울에 3개의 잠실이 설치되었다. 즉 연희궁의 서잠실과 아차산 아래 동잠실(현 송파구 잠실동 ) 그리고 잠원동 지역의 신잠실이 있었다.

신잠실의 정확한 설치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용재총화』권10 제4조에 「요사이 또 설치한 신잠실은 한강 아래쪽 원단동에 있다.」라고 한 외에 「원단은 한강 서쪽 동네에 있는데 세조가 일찍이 하늘에 제사하기 위해 거동하였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곳이 현 잠원동지역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신잠실의 설치연대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용재총화』가 성조 ~ 연산군 재위 때에 저술 되었으므로 적어도 신잠실은 이 기간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신잠실은 동ㆍ서잠실과 함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유명무실해졌다. 그러나 조선말부터 일제 강점 초까지 잠원동에는 뽕나무 묘목을 재배하고 잠종을 보급하였으며 잠업강습소가 세워지기도 했다. 참고로 조선시대 잠실의 역할을 살펴보면 첫째, 양잠을 통해 견사를 생산하여 호조에 공납하며, 둘째 잠종을 보급하며, 셋째 상묘를 길러 관사와 민가에 배포하고, 넷째 백성들에게 양잠기술을 습득시키는 일 등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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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릉인릉

헌릉인릉
헌릉인릉
지정별 사적
지정번호 제194호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산13번지 1호
(서초구 헌인릉길42)
지정일 1970. 5. 26
소유자 국가
관리자 문화재청

내곡동 산 13번지 1호 대모산 아래에는 헌릉과 인릉이 자리잡고 있다.
헌릉은 조선 제3대 태종 (太宗)과 왕비 원경왕후 민씨 (元敬王后 閔氏)의 능이고, 이 능의 오른쪽에 있는 인릉은 23대 순조(純祖)와 왕비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 金氏)의 능이다. 흔히 헌릉과 인릉을 합쳐서 헌인릉이라고 부르는데 이두개의 능 은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 194호로 지정되었다.
헌인릉의 뒷산인 대모산은 해발 290.8m로서 산모습이 할머니와 같다하여 할미산 또는 대고산(大姑山)으로 칭하여 오다가 태종의 헌릉이 자리잡자 어명으로 대모산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헌릉

헌릉의 능역 면적은 411.014평이며 세종 2년 (1420)에 조성된 태종 (太宗 : 1367 ~ 1422)과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 1365 ~ 1420)의 동원이봉(同原異封)의 쌍릉이다.
태종은 태조의 제5남으로 함흥 귀주동 사저에서 탄생하였다. 조선의 개국에 큰 공을 세웠으나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방석의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고 「왕자의 난」을 일으킨 후 1400년에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재위기간 중 궁궐과 관아를 건설하고 배불숭유정책의 강행, 관제 개혁, 신문고의 설치, 호패법 실시 등 왕조의 기초를 다지는 치적을 남기고 세종에게 전위하여 4년간 상왕으로 머물다가 세종 4년(1422) 5월 10일 연화방 신궁에서 승하하여 동년 9월 6일 옹후 옆에 봉릉하였다.

원경왕후 민씨는 송경 (현 개성) 철동에서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 탄생하여 태조 즉위 후 정녕옹주에 봉해졌으며 정종 2년(1400 ) 정빈, 정비에 책봉되었다. 세종을 위시하여 4남4녀를 낳고 세종 2년(1420) 7월 10일 수강궁 별전에서 승하하여 동년 9월 17일 장우본릉 하였다. 원경왕후가 승하함에 따라 능지로서 광주 서대모산이 선정되었으며, 태종은 국상에 법석은 물론 원찰도 금하였다.

능의 상설은 고려현릉과 정릉의 제도를 답습하여 영조하였다. 즉 봉분을 2기로 하되 주위의 난간을 터서 연결시킨 쌍릉제이다 . 봉분 하부에는 병풍석을 만들어 우석에는 영저 영탁을 넣었고 면석 와형운문을 두르되 중앙에 각 방위별로 12지신상을 조각하고 하단에는 영지를 조각하였다. 병풍석은 앙연엽, 복연엽을 조각하였으며 그 앞은 낮은 석계로 되어 있다.

배치된 상설은 곡장 3면 합설, 병풍석 12면, 난간석 10간, 혼유석 2, 명등석 2, 망주석 1쌍, 문석2쌍, 무석 2쌍, 마석4쌍, 양석 4쌍, 호석4쌍(이상 합설), 정자각, 구 신도비 1기, 신비 1기, 홍전문이 있다. 태종신도비는 헌인릉 내의 정자각 오른쪽 뒤 비각 안에 위치하고 있다.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손상되어 숙종 때 다시 세운 것으로 구비와 나란히 세워져 있다. 구비는 귀부와 이수를 갖춘 통비로서 비신의 높이는 280㎝이며, 폭 137㎝, 두께 39㎝ 이고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마멸이 심하다. 비의 건립연대는 세종 6년(1424)이다.

신비는 화강암으로 된 귀부와 거의 같은 형태와 크기이다. 비의 중건 시기는 비문 말미에 " 永樂二十二年五月 日立石 後二石七十 二年乙亥五月 日重建"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숙종 21년(1695)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전액은 2이행으로 「태종헌릉지비」 라고 종서되어 있으며 자경은약 15㎝정도이다. 비문은 변계량(卞季良) 이 찬(撰)하였고 비음은 박태상이 기 히였으며, 글씨는 이덕성, 홍수주가 전 하였다.

비문은 해서로서 자경은 2 ~ 3㎝ 이다. 비의 전면에는 태종의 출생 및 즉위과정과 자녀관계그리고 행적 및 업적에 대한 기록이 있다. 비 후면에는 개국공신 방의, 의안대군 이화 등 37명과 정사공신 완원부원군 이량우 등 17명, 그리고 좌 명공신 진산부원군 하륜등 37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신도비는 태조 때부터 세종대왕을 모신 구 영릉 때까지 설치되었으며, 신 영릉(여주)과 현릉 문종 현덕왕후 권씨 이후부 터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문인석은 전체 길이가 232㎝로 동체는 원만한 질감을 주고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얼굴부분을 제외하고 는 입체감이 결여된 느낌을 준다. 복두의 높이는 42㎝이며 양각 이 위를 향해 둥글게 올라가면서 서로 교차된 형태의 교각복두로 제작되었다.

포의 깃 형태는 수염에 가려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좁게 파인 반령이다. 전체 길이가 109㎝, 중의 는 65㎝가 되며, 공복 뒤 고대 깃 위로 다른 깃이 불쑥 나타난 것은 포 속에 받쳐 입은 중의로 보인다. 소매 끝으로 양손을 가렸으며 소매에 굵은 5개의 융기선을 삼각형이 되도록 조성하여 첩리의 소매끝이 나타나 있고 홀 쥐고 있는 손은 포개 덮고 있어 분명치 않으나 홀의 길이 47㎝ ,폭 10.6㎝ 이다.
조금 보이는 괴재는 문양이 없으나 후대에는 3개의 직사각형 안에 화판문이 각각 시문되어 있다. 잔 여 요대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대각선형이며 끝에 1개의 화판문 이 있고, 배면의 대 아래에는 4개씩 양옆에서 중심부를 향해 사선이 나타나 있다.

신발은 땅속에 약간 묻혀 확실하게 말할 수 없으나 태조 원년 관복제도중 신발에 대하여 「화계용조색」 이라고 한 것에 따라 조색의 화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무인의 갑주는 전투용과 의식용으로 구별하여 착용하는데 헌릉의 무인석 갑옷은 의식용이다. 전체 신장 308㎝의 웅대한 동체에 용맹스러운 무장을 표현하였다. 투구는 부조의 마멸이 심하여 자세한 문양을 알 수 없지만 아가 투구와 같이 연결되었고, 갑옷의 전체 솟을고리 모양이 원형이다.

흉갑 앞의 대는 화문이 있으며 좌우 늑갑에는 운문, 배갑에는 어린문이 각각 시문되었다. 겨드랑이에는 호액을 하였고 활동성을 기하기 위하여 팔꿈치 뒤에서 소매끝을 질끈 동여맨 형태로하여 박진감을 보여준다. 칼집 길이 92㎝, 칼길이 106㎝로서 양손 아래에 2개의 나비형으로 끈을 내려뜨리고 있으며, 왼쪽의 칼집은 옆구리에서 2개의 술로써 연결하여 호사스럽게 매달았다.

인릉

헌릉의 오른쪽에 위치해 있는 인릉은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자좌오향으로 영조한 동원합봉 형식의 합장능이다.
『신중동국여지승람』권 6 경기도 광주군 능침조에는 인릉에 대하여 「헌릉의 오른쪽 언덕에 있는데, 순조대왕의 능이다. 기일은 11월 13일이고 처음에 장례 모신곳은 교하 장릉국내인데 철종 7년에 이곳으로 천장하였다.
순원왕후 김씨도 (이곳에) 합장하였는데 기일은 8월 4일이다. 령·참봉이 각가 한명이다.」라고 씌어 있다.

순조는 수빈 박씨의 소생으로 정조 14년(1790) 6월 18일에 창경궁 집복헌에서 탄생하여 정조 24년(1800) 7월 4일에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고, 재위 34년 45세로 1834년 11월 13일 경희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여 1835년 4월 19일 파주교하구후 장릉국내에 초장하였다가 풍수지리상의 불길론을 이유로 철종 7년(1856) 10 월 11일 현위치로 이장하였다. 순조는 정조의 제2남으로 11세에 즉위하였다. 이에 정순왕후가 섭정하고 김조순이 국구가 되어 안동김씨가 세도정치를 함으로써 신유박해, 을해박해 등 천주교 탄압, 홍경래란등 변란으로 민심이 불안하였다.

순원왕후 김씨는 영안부원군 조순의 딸로 정조 13년(1789) 5월 15일 탄생하여 철종 8년 (1857) 8월 4일 창덕궁 양심각에서 승하하였으며 동년 12월17일 장우본릉 하였으며 순조와 사이에 2남 3 녀를 두었다. 왕과 왕후는 광무 3년(1899) 11월 17일에 숙황제· 숙황후로 추존되었다. 인릉은 일반적인 단릉과 같이 혼유석1좌만 있는 2실로 합장하였고,명등석은 영릉을 모방하였다.

문인석은 전체신장 260㎝의 단령포차림이며 복두의 높이는 49㎝ 로서 전각형으로 복두끈이 있고 안면은 악간 미소를 띤 표현을 하였다. 길이 55㎝,폭16㎝의 홀은 턱에서 조금 내려서 자연스럽게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은 감싸고 있는데 상하의 폭이 같은 직선형이다. 왼쪽 어깨부분에서 팔위까지는 가는 여밈끈을 길게 나타냈으며, 손목 바로 밑에는 25㎝의 협수를 나타냈고 다시 수직으로는 110㎝ 정도의 첩리가 있다. 관대의 전면은 중간에 위치하며 화문 1개와 배면에는 5개의 사각형 안에 각각 화문을 시문 하고 잔여 요대는 좌측에서 우측으로 경사지면서 쌍조융기선을 중앙에 넣고 끝부분에는 1개의 화문을 넣었다.

무인석은 전체신장이 277㎝ 정도로 투구의 돌출문양이 뚜렷하며 정개에는 홍모와 비슷한 형태로하여 전면은 높고 뒤로 넘어가면 서 점차 낮아진다. 발의 전후중앙에는 3개의 보주를, 좌우에는 5개의 보주와 그 사이에는 십자형의 보주 5개씩을 4군데에 표시 하였고 하부에는 쌍조융기선대가 있다.

훙갑은 중앙에 융기선대를 만들고 그안에 연주문 4개를 넣었으며 외곽에는 좌우에 솟을고리문을 하였다. 견갑은 곡선을 만들었으며, 토시의 상하에는 파도문양을, 중앙에는 융기선 안에 연주문을 시문하였다. 늑갑은 겨드랑이부터 대퇴부까지 운문으로 처리하였다.

흉각 전면에는 나비형으로 묶은 끈이 이싿, 칠갑 위에서 오른손 으로 칼을 잡고 술은 늘어뜨려 장식하였으며 칼날부분에는 2개의 술을 나비형으로 처리하였다. 늑갑 아래의 갑옷은 어린문과 쌍조 융기선으로 하고 단은 화판형으로 매우 화려하게 표현하였다. 팔꿈치 뒤로는 이중 파도무늬의 웅장한 옷자락과 갑옷 아래로는 뒤로 나부끼는 듯한 동다리의 주름잡힘을 더욱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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